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이마르 공화국/역대 국가의회 선거 (문단 편집) === 제6대 총선 (1930) === ||<-10> 1930년 9월 14일[br]{{{-2 총원: 577석, 과반의석: 289석}}} || ||<-5> '''[[하인리히 브뤼닝|브뤼닝]] 1기 내각'''[*비상대권A 의회의 동의 없이 [[바이마르 공화국#s-3.4|대통령 비상대권]]으로 선거 이전의 내각이 교체 없이 지속됨] [br]{{{-2 '''183석'''}}} ||<-5> 야당[br]{{{-2 394석}}} || ||<#221144> [[독일 중앙당|{{{#fff 중앙당}}}]] ||<#007fff> [[독일 인민당|{{{#fff 인민당}}}]] ||<#ffca08> {{{#000 국가당}}}[*A [[독일 민주당|민주당]]이 다른 군소정당과 합당하여 창당한 정당] ||<#77eeff> {{{#000 바이에른[br]인민당}}} ||<#aacc66> {{{#fff 기타}}}[* 중간계급제국당 23석, 기독교국가농민당 19석, 보수인민당 4석] ||<#e3000f> [[독일 사회민주당|{{{#fff 사회민주당}}}]][*신임] ||<#885522> [[나치당|{{{#fff 나치당}}}]] ||<#880000> [[독일 공산당|{{{#fff 공산당}}}]] ||<#00aeef> [[독일 국가인민당|{{{#fff 국가인민당}}}]][* 국가인민당은 본래 1930년 3월에 결성된 브뤼닝 1기 내각에 참여하였으나, 국가인민당 소속 장관이 1930년 7월 탈당하여 기독교국가농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야당이 되었다. 국가인민당 내 대다수는 애초부터 브뤼닝 내각에 호의적이지 않았다.] ||<#aacc66> {{{#fff 기타}}} || || 68석 || 30석 || 20석 || 19석 || 46석 || 143석 || 107석 || 77석 || 41석 || 26석 || 브뤼닝 내각의 국정운영은 입법이 아닌, 입법부를 거치지 않는 [[바이마르 공화국#s-3.4|대통령 비상대권]]에 의존해 이뤄졌다. 급기야 예산안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통과되기에 이르자 [[독일 사회민주당|사회민주당]]은 헌법에 따라 독일 공산당, 나치당, 국가인민당과 연합해 해당 대통령 비상대권을 무효화시키며 정부에 비협조하였다. 이에 [[파울 폰 힌덴부르크|힌덴부르크]] 대통령은 아예 의회를 해산했고,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. 하지만 [[세계 대공황]]으로 인한 [[디플레이션]]이 심화되면서 민심은 끊임없이 정국 불안정이 반복되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. 그 결과, [[독일 공산당]]과 [[나치당]]이 민심을 파고들며 선전하였고, 특히 나치당의 득표율은 2년만에 2.6%에서 18.3%로 수직상승했다. 이러한 나치당과 공산당의 상승세에 놀라 정국 안정을 급선무로 받아들인 [[독일 사회민주당|사회민주당]]은 브뤼닝 내각에 적극 협조하는 방향으로 정치 노선을 전격 선회하였다.[* 심지어 브뤼닝 내각이 적극적으로 재정 긴축 정책을 펼쳤고, 이로 인한 민심 이반이 심각했음에도 사회민주당은 이를 수용하였다.] 이를 통해 브뤼닝 내각은 국정운영에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